몸소 잡아주신 갑문위치
조국강산을 인민의 행복한 생활이 꽃펴나는 훌륭한 삶의 터전으로, 사회주의무릉도원으로 만드실 웅지를 안으시고 한평생 불면불휴의 심혈과 로고를 기울이신 위대한 수령님,
우리 수령님의 현명한 령도에 의하여 이 땅우에 솟아난 기념비적창조물들은 그 얼마이며 천지개벽을 이룩한 고장들은 또 얼마이던가.
수십리 날바다를 가로지른 서해갑문도 로동당시대의 위대한 전변의 력사와 더불어 길이 빛날 기념비적창조물이다.
우리 수령님께서 서해갑문의 위치를 잡아주신 이야기는 오늘도 우리가 얼마나 위대하신분을 모시고 혁명하였는가를 가슴깊이 느끼게 한다.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우리 수령님은 천리혜안의 예지로 멀리 앞을 내다보신 위인이십니다.》
주체70(1981)년 5월 22일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여러 일군을 부르시고 친히 서해갑문위치를 확정해주시기 위하여 그들과 함께 배를 타시고 남포앞바다로 나가시였다.
그이께서 내정하신 갑문위치는 은률군의 끝살뿌리와 피도, 광량만입구사이를 련결하는 선상에 놓이였다.
거기는 남포항에서 무려 40여리나 떨어져있는 날바다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 생각하고계시는 갑문위치에 대하여 알게 된 일군들과 전문가들은 모두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너무도 뜻밖의 안이였던것이다.
사실 갑문을 어디에 건설하겠는가 하는 문제를 두고 여러가지 안이 제기되고있었다.
갑문위치를 어디에 정하는가 하는것은 그의 건설과 운영관리에서 결정적의의를 가지는 중요한 문제였다.
하지만 그 누구도 수십리 날바다를 가로지르는 그런 갑문건설에 대하여서는 상상조차 해보지 못하고있었다. 그저 공사량에 대해서만 생각하다보니 일군들과 기술자들이 제기한 갑문위치와 관련한 안들은 대동강하구주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있었다.
어느덧 배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내정하신 갑문위치에 도달하였다.
순간 일군들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올리였다.
그곳은 신통히도 대동강물과 바다물이 경계를 이루는 곳이였다.
마치 자를 대고 줄을 그은것처럼 대동강물과 바다물의 계선이 뚜렷한데 바다물은 바닥이 들여다보이게 맑고 린접한 대동강물은 흘러내리는 퇴적물로 하여 흐려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윽토록 드넓은 바다와 강기슭을 살피시다가 만족하신 어조로 말씀하시였다.
《갑문위치가 확실히 명당자리입니다.》
일군들의 가슴도 환희와 격정으로 세차게 끓어번졌다.
바로 여기다. 여기에 갑문을 건설하면 감탕퇴적현상으로 인한 피해가 없게 될것이 아닌가.
실로 그 누구도 따를수 없는 비범한 통찰력과 뛰여난 예지를 지니신 우리 수령님께서만이 잡아주실수 있는 갑문위치였다.
일군들과 기술자들은 끝없는 매혹과 흠모심을 안고 어버이수령님의 존안을 우러렀다.
허나 그들은 다는 알지 못하고있었다.
서해갑문을 건설할 위치문제를 놓고 우리 수령님께서 얼마나 크나큰 심혈과 로고를 바치시였는지.
대동강물에 의한 퇴적물의 운반, 바다감탕의 형성과 대동강하구에서의 퇴적, 밀물, 썰물현상과 갑문건설과의 관계, 갑문건설이 침적현상에 주게 될 영향과 그것이 갑문관리운영에 미치게 될 영향 등 갑문의 위치를 확정할 때 고려해야 할 문제들은 수없이 많았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 모든 문제를 놓고 사색을 거듭하신 끝에 은률군의 끝살뿌리와 피도, 광량만입구사이를 가로질러 갑문을 앉히기로 결심하신것이였다.
물론 그렇게 하면 공사량은 방대해질것이였다.
그러나 공사량만 가지고 만년대계의 갑문위치를 정할수는 없기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거창한 대자연개조사업을 벌리실 웅대한 구상을 펼치신것이다.
명당자리에 몸소 잡아주신 서해갑문위치,
세상사람들이 오늘도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기념비적창조물인 서해갑문은 이렇듯 위대한 수령님의 비범한 예지와 숭고한 헌신의 결정체이다.
이렇듯 걸출한 위인을 모시였기에 우리 인민은 놀라운 속도로 사회주의건설을 다그쳐 세인을 놀래우는 기적같은 현실을 이 땅에 펼칠수 있었으며 우리 조국은 날로 살기 좋은 인민의 락원으로 전변될수 있은것이다.
정녕 희세의 위인이신 위대한 수령님을 모시고 살며 일한것은 우리 인민의 더없는 영광이고 행운이며 행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