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인의 일화

조선의 7. 27, 승리의 날

  조선인민은 7. 27을 전승절로 기념하고있다.

  지난 세기중엽 동방의 자그마한 반도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후 가장 가렬처절한 전쟁으로 기록된 조선전쟁(1950년-1953년)이 발발하였다. 미국이 조선반도를 세계제패전략의 성공여부를 가늠하는《시험장》으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간의 《결전장》으로 규정하고 남조선군을 사촉하여 조선전쟁을 일으켰던것이다.

  전쟁이 일어날 당시 제2차 세계대전의 전승국인 미국이 패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거의나 없었다. 창건된지 2년도 채 안되는 조선민주주 의인민공화국이 이 전쟁에서 승리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더구나 없었다. 전쟁을 도발하면서 미국이 72시간안으로 승리할것으로 타산한것은 결 코 우연한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판하였다. 전쟁이 지속될수록《미국은 대문을 발길 로 걷어차서 열었으나 방으로 들어갈수 없었으며 나올수도 없는》진퇴량 난의 처지에 빠지게 되였던것이다.

  남의 땅에 뛰여들어 불을 지른 범죄의 대가는 값비싼것이였다. 조선 전선에 자기 나라 륙군의 3분의 1과 공군의 5분의 1, 태평양함대의 대 부분과 그리고 15개 추종국가군대, 남조선군 지어 구일본군잔당들까지 200여만의 대병력을 동원하였지만 전쟁에서 입은 미국의 손실은 제2차 세계대전시기 태평양전쟁 4년간에 입은 손실의 거의 2. 3배에 달했다.

  막다른 궁지에 몰려 더는 다른 출로를 찾을수 없게 된 미국은 마침 내 정전협정에 조인하지 않을수 없었다.

  7월 27일은 조선에 있어서 《유엔군》의 모자를 쓰고 덤벼든 다국적 무력을 쳐물리치는 신화를 창조한 전승의 날로 새겨지게 되였다. 100여 차례의 전쟁들에서 한번도 패한적이 없다던 미국에 있어 《강대성》의 신화가 깨여지고 서산락일의 운명에 처한 날로 기록되게 되였다.

  《유엔군》을 대표하여 정전협정에 서명한 클라크는 자기가 《력사상 승리하지 못하고 정전협정에 조인한 첫 미군사령관》이라고 개탄했다. 하다면 승패의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침범자들의 수적 및 기술적우세에 대한 조선인민과 인민군장병들의 사상정신적 및 전략전술적우세에 있다.

  불의적인 침공에 즉시적이며 결정적인 반공격, 일시적인 전략적후퇴 와 정규군에 의한 강력한 제2전선형성, 적극적인 진지방어 등 령활한전략전술과 정규전과 유격전, 산악전, 갱도전, 포위 및 우회전, 매복전, 비행기 및 땅크사냥군조운동, 저격수활동을 비롯한 독창적인 전법들앞 에서 서방의 군사기술적우세는 산산이 부서져나갔다.

  당시 마카오주둔 뽀르뚜갈군 참모장이였던 고메스는 《당시 미국이 만든 작전계획은 미국편에 선 서방나라들의 참모장들, 군사전문가들 인 수십명의 장군들이 여러 차례 모여서 토의한 끝에 만든것이다. 그 런데 김일성주석께서는 그것을 단독으로 격파하시였다. 나는 이것을 내 눈으로 보고 그이이시야말로 이 세상에 한분밖에 없는 천재적인 군 사전략가이시며 위대한 령장이시라는것을 알게 되였다.》고 말하였다.

  김일성주석의 사랑과 믿음은 조선인민과 인민군장병들을 조국수호전 에로 고무추동하는 중요한 사상정신적원천이였다.

  그이의 손길아래 자기 위업의 정당성과 그 승리에 대한 신심, 적에 대한 끝없는 증오심으로 충만된 조선인민과 인민군장병들은 세계전쟁사 가 알지 못하는 영웅적위훈을 세울수 있었다. 단 4문의 포로 적 5만여 명의 상륙작전을 3일간 지연시킨 해안포병들과 자그마한 어뢰정으로 적 중순양함을 까부신 해병들, 적의 화구를 몸으로 막은 병사와 수류탄을 안고 적땅크밑으로 뛰여든 녀병사를 비롯한 수많은 병사들이 조국을 위 하여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서슴없이 바쳤다.

  조선인민의 전승 7. 27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무력의 강화발전 과 더불어 그 력사적의미가 더욱 부각되고있다.

  7. 27은 조선인민의 영원한 승리의 날로 길이 빛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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